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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educh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2
동화 읽고 밥 해먹기, 청소년 프로그램
동화가 있는 저녁 식사
전북 전주 완산동에 고백교회가 있다. 교회 정체성의 하나로 ‘가장 가까운 이웃인 동완산동 주민과 함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한 몸 평화 지역주민 공동체’를 표방하는 교회다.
교회의 ‘이웃’에는 어른만이 아니라 이 지역의 아이들, 청소년들도 당연히 포함된다. 완산동은 흔히 말하는 ‘부자 동네’는 아니다. 가난한 이웃들이 많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가난을 체험한다.
교회 가까운 곳에 완산골 지역아동센터가 있다. 대체로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이 센터를 드나든다. 학교가 끝난 뒤 학원을 가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 이 아이들에게 지역아동센터는 방과 후 학원도 되고, 피시방도 되고, 쉼터도 되는 곳이다. 그렇게 학교와 지역아동센터를 통해 성장한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게 되면 이 아이들은 ‘청소년’이 된다.
문제는 청소년을 위한 시설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전주시에는 지역아동센터가 69개소가 있지만, 청소년센터(야호청소년센터)는 4곳밖에 없다. 이 동네 청소년들이 갈만한 시설이 가까운 곳엔 없다. 고민은 여기서 출발했다. 완산골 지역아동센터를 거친 청소년들은 초등학교 때도 그랬던 것처럼 학원을 가는 친구들이 거의 없다. 이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는 없을까?

그라운드 룰 정하기
누가? 언제? 어떤 내용으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지? 등등의 숙제를 안고 논의는 시작되었다. 논의는 고백교회 이강실 목사를 비롯한 (사)한몸평화 운영진과 (사) 청소년의 안전을 생각하는 의사들의 모임(이하 ‘청의’)이 같이 했다. ‘청의’ 사무실은 완산동과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그 논의의 가운데 필자도 있었다. 무슨 자격으로? 고백교회 교인으로, (사)한몸평화 회원으로, ‘청의’ 사무장의 남편으로·····ㅎ
몇 가지 기본 방향 설정하다.
‘청의’가 주최하고 (사)한몸평화가 주관한다. 프로그램 명칭은 ‘동화가 있는 저녁(동화저녁)’으로 한다. 매주 금요일 오후에 하며 횟수는 12회로 한다. 완산골 지역아동센터와 긴밀한 협조체계를 통해 참여할 청소년들을 모집한다. ‘동화’는 몇 명의 지도교사가 분담하여 동화책을 읽고 생각 나누기 시간으로 하고, ‘식사’는 필자가 주 요리사로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는 식으로 운영한다. 방학 중 시작은 오후 4시, 학기 중엔 5시 30분으로 한다.
먼저 완산골 지역아동센터를 거쳐 간 청소년 12명을 모집했다. 프로그램의 장소는 고백교회로 정해졌다. 2~3명의 지도교사가 동화를 선정하여 아이들과 함께 진행하기로 하고, 저녁의 메뉴는 주로 아이들의 희망을 들어 정하되, 배달 음식은 안 되고 최대한 아이들이 직접 요리를 해서 먹을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주 요리사 역할을 맡기로 한 필자는 요리 경험이 짧았지만, 요즘은 워낙 다양하고 쉬운 조리법들이 핸드폰만 열면 무궁무진하므로 큰 걱정은 없었다.
2023년 2월 3일, 동화 저녁 프로그램의 첫날이 왔다. 시작 시간인 4시가 한참 남은 3시 조금 넘어지고부터 아이들이 한두 명씩 나타났다. 모두 11명이 왔는데, 그 중엔 초등학생도 몇몇 있었다. 나중에 센터장님으로부터 들어보니 약속했던 아이 중 일부가 사정상 참석이 어렵다고 했단다. 센터장님은 12명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초등학생들을 일부 보내왔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도대체 누구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 아이들이 하는 얘기 중 어떤 게 진실이고 어떤 게 농담인지 등등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이고~~~~! 내가 이 아이들과 과연 12번의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을까? 걱정이 크게 앞섰다. 김OO샘의 지도로 첫 시간을 시작했다. 먼저 앞으로 우리 프로그램에서 적용할 그라운드룰을 정하고 조를 편성하고 원하는 저녁 메뉴를 정해나갔다.
첫날 메뉴는 떡볶이
11명의 아이 중 일부는 성격도 적극적이고 요리에도 관심이 많아 솔선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많은 아이는 프로그램 운영 시간 내내 핸드폰에 열중하는 모습도 보였다. 요리 시간의 참여도 또한 제각각····
첫날 프로그램을 마치고 간단한 평가 시간을 가졌다. 쉽지 않겠다고,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이런 시간이 없었기에 그런 것이니 이해하면서 차츰 친밀감, 신뢰도가 쌓이면 좋아질 거라 자신을 위로했다. 그리고 센터장님께는 부탁했다. 담당자와 아이들은 지속해서 만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시간을 통해 친숙해질 것이고 그래야 앞으로도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니, 굳이 숫자를 채우기 위해 새로운 아이들을 일회성으로 보내는 일은 삼가달라고····

아이들과 마라탕 만들기
메뉴를 물어봤더니 ‘OO이 귀 요리’라나 뭐라나 완전 초등학생 수준의 주문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나중에 몇 가지 메뉴가 주문되었다. 마라탕, 샌드위치, 초밥, 김밥, 볶음밥, 치킨, 피자 등등···· 오마나! 다음 주는 마라탕인데, 나는 조리법은커녕 마라탕을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어떡하지?
일단 부딪혀 보는 거지, 월요일인가 마라탕 집엘 갔다. 여러 가지 재료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주인의 안내에 따라 몇 가지 재료들을 선택해 맛을 보았다. 와! 이래서 마라탕 마라탕 하는구나! 그리고는 내가 즐겨 검색하는 ‘OO의 조리법’의 도움으로 요리법을 작성하고 음식 재료를 구입하고(식재료 구매는 청의 사무장인 아내와 둘이 도맡았다)
마라탕은 매웠고, 비주얼도 아니지만
드디어 두번째 날, 오늘도 김OO샘의 지도로 ‘아마도 너라면’을 읽고 생각 나누기를 할 것이다. 곁에서 잠깐 지켜본 필자의 생각은 ‘아마도 나라면 관둘 거야’였다, 솔직히. 아이들은 집중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김샘도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제어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최대한 아이들을 존중하는 착한 김샘. 평가 시간에 동화에 대해 재고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워낙 책 읽기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많았기에 지도하는 사람에 따라 동화책을 읽을 수도 있고, 좋은 동영상을 시청할 수도 있고, 동화보다 쉬운 그림책을 읽는 등 다양화해보자는·····
필자가 구성한 요리법의 마라탕은 매웠고, 비주얼도 영 아니었지만, 아이들은 나름 맛있게 먹어줬다(ㅎ).
5회차가 시작된 3월 3일 이후에는 아이들이 모두 등교를 해야 했기 때문에 시작 시각을 5시 30분으로 하고 동화는 1시간, 6시 30분부터는 저녁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 12회차가 진행된 4월 21일까지 때로는 동화책으로, 때로는 동영상으로, 때로는 그림책을 가지고 최대한 아이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생각 나누기를 해보려 애를 썼다.

김밥 만들기
필자도 ‘빼떼기’, ‘강아지똥’, ‘아낌없이 주는 나무’ 등의 책과 ‘이철환의 위로’ 등의 동영상 자료를 가지고 모두 6차례 담당했는데, 회차를 진행할 때마다 때로는 스트레스를 받기도, 때로는 아이들의 생각에 감동하기도 하는 등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한 번의 외식(아이들과 인근의 전주한옥마을을 산책하며 먹고 싶은 것 사 먹기) 외에는 음식을 사 먹지 않기로 한 약속이 있었기에 회차마다 메뉴에 따른 조리법을 만드는 것도 내겐 큰일이었다. 그래도 위의 메뉴 외에 삼겹살볶음, 밥전, 스테이크까지 우린 거의 완벽하게 해냈다. 오 마이 갓!!
참석자 숫자는 그때그때 달랐다. 학교처럼 의무성을 띤 것도 아니고, 가족들과의 일정이 있는 경우도 있다 보니 적게는 8명에서 많게는 12명까지, 평균 10명의 아이와 함께한 3개월이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다르다 보니 학교 시간이 일정치 않아 프로그램 시작 시각이 맞춰지기 어려운 점은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프로그램 이름도 '오늘 저녁 어때? '
동화 저녁 프로그램이 끝난 뒤, 지난 3개월의 여정이 끝났다는 생각에 시원하다는 느낌이 왔으나, 이대로 아이들과의 만남을 끝내기에는 무언가 허전했다. 아마도 아이들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관심법도 작동했을까?
청의와 한 몸 평화 운영진과의 간담회를 통해 후속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다. 기간은 여름방학 기간을 주로 하되, 회차는 5회로. 그리고 그 중 1회는 평화 기행을 하기로 했다. 다행히 전북겨레하나에서 실시하는 청소년 평화통일 기행의 한 회차를 우리에게 배정하기로 합의되어 기행은 청의, 한 몸 평화, 전북겨레하나가 함께 공동 운영하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일단 책을 읽는 것은 피하기로 했다. 필자는 공립대안학교에서의 경험(고산고의 LTI)을 떠올리며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만남을 제안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청년들과의 만남의 시간을 통해 불투명하고 불안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고 고민 상담 및 조언을 듣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물론 저녁은 또 우리가 만들어 먹는 걸로····
동화책 읽는 시간이 빠졌으니 프로그램 명칭도 새롭게 고쳤다. “오늘 저녁 어때?” ‘오늘 저녁 시간에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 어때’라는 의미와 ‘오늘 저녁 식사 함께하는 것 어때’라는 의미를 담은 제목이었다. 4명의 청년 교사가 섭외되었다. 공무원, 요리사, 빵집 주인, 바늘공작소 운영자. 특별할 것도, 아이들이 꿈꾸기 불가능한 것도 없는 평범한 우리 이웃 청년들이었다.
첫날인 7월 14일(금). 아!! 이 비를 어쩌란 말이냐?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를 뚫고 프로그램에 찾아온 아이는 단 두 명. 난감해하는 청년 교사에게 그냥 자연스럽게 대화할 것을 주문했다. 어쩌겠는가?
불볕더위와 유례없는 폭우가 휩쓸고 간 지난여름은 아이들과 뭔가 프로그램을 운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나보다. 참석자는 2명에서 4명, 7명 그리고 마지막 10명.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청년 교사들은 괜찮았다고 말은 했지만, 딱 보면 알 수 있는 한국인의 능력으로 볼 때 꽤 힘들었으리라.... 참석자 수가 워낙 적다 보니 센터에서는 다시 낯선 아이들을 보내왔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은 서먹서먹하기도 하고, 집중도 잘 안 돼서 아이들이나 교사들은 퍽 힘들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평화 기행은 태풍으로 취소, 케이크 만들기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8월 11일(금)~12일(토) 1박 2일로 예정되었던 철원지역 평화 기행을 앞둔 8월 10일 태풍 카눈이 한반도에 상륙한다는 예보가 있었다. 우리 출발 예정일인 11일에는 한반도를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태풍의 범위가 워낙 광범하여 12일까지도 철원지역엔 비가 올 것으로 예보되었다. 여름 폭우로 인한 큰 피해들이 보도되고 있던 상황에, 이 태풍을 무릅쓰고 우리가 기행을 가야 하는가 논란 끝에 무엇보다 아이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기행을 취소하였다.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아쉽기는 아이들도 마찬가지. 기행을 못 간 대신 맛있는 거나 먹자며 아이들을 불렀다. 미안한 마음과 위로의 마음을 담아, 프로그램 운영 이래 처음으로 배달 음식을 시켰다. 그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마는····

아이들과 완성한 케이크
그날 아이들에게서 신선한 제안이 있었다. 다음 주 그러니까 8월 18일은 마지막 날이니까 기념하는 의미에서 메뉴를 케이크 만들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 또한 필자는 한 번도 경험이 없는 일이었으므로 여기저기 빵집들을 찾아다녔다.
겨우 케이크 시트 3개와 생크림 재료들을 사 아이들이 직접 생크림을 만들고 과일 토핑까지 완성했다. 처음 만들어보는 생크림이 잘 될까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적절한 역할 분담으로 케이크를 완성하였고, 촛불을 꽂아 함께 불어 끄는 등 한껏 분위기도 띄웠다. 모양이 깔끔하진 못했지만 스스로 케이크를 완성한 데 대해 만족한 표정들이었다. 물론 맛도 적당히 좋았다.
이제 지난겨울에서 봄까지 12회(동화 저녁), 이번 여름 5회(저녁 어때) 등 총 17회의 프로그램이 완료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지역의 청소년들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시간과 쉼의 공간을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고, 도움을 줄 단체(청소년의 안전을 생각하는 의사들의 모임-대표:박철영/사단법인 한 몸 평화-대표:김윤수)들, 장소를 제공한 전주 고백교회와 아이들을 돌봐 온 완산골 지역아동센터 등 여러 기관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태풍으로 취소된 청소년 평화 기행은 전북 겨레하나와의 공조 속에 가을쯤 장소를 변경해서라도 다시 추진할 계획이다. 청소년들에게 통일과 평화의 의미를 느끼게 할 수만 있다면 언제면 어떻고 어디면 어떻겠는가?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마다 집중하지 않는 아이들의 태도 때문에 속상하기도 하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기도 했지만, 콩나물시루에 물이 쑥 빠져나가도 끝내 콩나물은 자라나듯이 훗날 아이들의 삶에 어떤 형태로든 추억이 되고 힘이 되었기를 작은 마음으로 소망해 본다.
장경덕 전북 취재본부장
출처: 교육언론창